신명기26장 해석보충 -십일조에 대한 몇가지 언급
2) 신명기 26장에서의 설교 본문 두 번째 본문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그들을 구원하셨음에 대한 것과 그 맏물을 드림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이것은 십일조가 교회의 구원사역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어져야 함을 문맥적으로 읽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선교후원금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기본적인 활동으로서의 모습이기 때문에 교회 운영과 복음사역 전반을 위한 것으로 봄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3) 본문에 나타나는 고아와 과부라고 하는 것은 교회와 복음으로 낳게 되는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교회의 신부로서의 모습을 주목할 때에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현상적으로 보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록 참된 신부요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지만, 과부로 표현되어질 수도 있고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동행하시지만 그 엠마오 두 제자와 같이 주님이 동행중에 계심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상대적 입장에서 주목할 때에 복음으로 낳은 아이로서의 성도의 모습이 고아와 같이 보여질 것이요, 객이라고 하는 것은 주의 택함을 말할 수 없다고 하여도 청함을 받은 자들의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교회에 나오게 되어지는 현상적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편적으로 칭하신 것으로 주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대되어질 수 있는 사회복음적 개념에서나 민중 해방신학적 입장에서는 가난하다는 개념과 고아와 과부를 일반사회적 언어로서만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성경의 구약적 성례전적인 실제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현상적 개념만으로 한정시켜서 비로소 적용 인식하는 가난한 자들이라는 표현이 사실성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사회복음으로서의 민중 해방신학자들은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답변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것이 사실로서 규정하는 실재는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이 더 핵심적인 그들의 고민이 될 것이다.
4) 몇가지 오해되어질 수 있는 것들을 지적하면 :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면 예배당 출석의 당위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소위 빈손으로 주 앞에 보이지 말라고 하심도 물질적 개념으로 비로소 행하기보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중심을 드림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자 할 때에 마땅히 드릴 것을 구별하여 찾을 수 있음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십일조에 기복적 측면이 있으나 그것은 비로소의 개념과 정체성이 아니고, 헌신의 한 표현이다,그리고 비유컨대 마치 여타 상황에 따라서 식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여도 식사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과 같이, 십일조와 헌물은 우리 자신을 드림의 한 표현으로서 기본적인 신앙의 표현이며 증거인 것이다. 맏물로서의 자신을 드림이라는 것이 기본적인 온전한 것이므로 그 표현의 행위여부에 매이지 않는 자유가 있다고 하여도 분별없거나 또는 증인으로서의 직무적 태만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성도는 없다는 것이다.
신명기 26장과 달리 말라기서의 십일조 개념은 하나님을 시험함이라든가 물질적 축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시대적 정황에 따라 십일조가 기복적 개념으로 정체성이 바뀐 것이 아니라 시대적 정황 속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성을 나타내고 그 백성의 연약함을 받으셔서 지켜 보호해주심이라고 하는 실제적 중심을 가지도록 하시고 그러한 한 표현으로서의 물질적개념에서도 축복의 사실을 찾을 수 있게 하셔서 우리의 감당할 수 있게 하시거나, 감당치 못하는 가운데서의 피할 길을 예배하심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할 것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도적질하는 것이란 말씀에 대하여서는,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나 여하한 가운데서 드리지 못하였을 때에도 교회 예배당 출석과 경배는 당연한 것이다. 다만 이미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마음에 두지 않고 기만적으로 교회에 나가서 기득권적인 행위를 하면서 십일조를 의도적으로 내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성도들의 잘못된 중심과 행위를 본받게 한다는 점에서 '양들'로서의 성도들을 기만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중심을 잃어 흩어지게 만드는 도적이라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물은 헌신과 함께 주의 구원에 대한 합당한 증거임을 교회에서는 가르쳐야 하고, 그 드림에 있어서는 강요가 아니라 드리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성을 갖출 수 있고 그 중심의 정당함을 주관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받는 자리에 이름이 합당한 모습이라고 하겠다.
참고 : 신명기 26장 설교 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