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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8월 01, 2006

게할더스보스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실제의식

게할더스보스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실제의식에 대한 설명과 그 의의해설


1. 게할더스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구속에서 보이는 이 주권과 관련된 모세 시대의 특정한 하나님의이름은 여호와이다. 이 발음은 이 단어의 자음들에 '아도나이'(Adonai) 의 모음을 붙여서 얻어진 것이다. 이러한 모음 부가는 원래 이 가장 거룩한 이름을 도대체 발음 하는 것조차 신중하게 꺼렸던 유대인들의 습관에서 기인한다. 그 단어를 발음하는 대신 언제나 아도나이를 썼으므로 편의를 위해서 모음이 부기될 때에 아도나이에 있는 모음을 붙였던 것이다.

중략

그러나 다른 한 요소, 즉 신실성의 요소가 처음부터 똑같이 강조되어 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출 6:5-6,8). 모세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보이신 출애굽기 33:19도 여호와라는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후기 성경 가운데는 특히 둘째 요소, 즉 신실성의 요소가 여호와라는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신 7:9; 사 26:4; 호 2:20; 말 3:6).



해설: 게할더스 보스는 본 언급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그 이름 '여호와'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자존의 절대자이심에 대한 것을 하나님의 이름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의 주권적 정당함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게 된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말함에 있어서는 거의 그 이름의 특성에서 읽을 수 있는 정도의 유익성을 말하고 있고 그 가능성에서 비로소 말하고 있지만, G 보스는 그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자의 자기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으로서의 주권을 말함으로써, '상식보편'에 따른 임의적 주권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납득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의 개념과는 달리, 분명한 주권의식을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에서 비롯된 실제의 개념으로 말하고 있다.





2. 게할더스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p. 148 중..

'..이 모든 파생 설명은 완전히 추측들일 뿐이다. 구약성경의 용법 배후에 어떤 원인인가 숨어 있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종교에서 권위적인 것은 출애굽기 3장의 계시를 통해 고정된 의미이며 우리는 이것만을 다루려고 한다. .. 이 신비의 해답은 그 문장 전체에서 찾아야 한다. '



해설: 같은 본문 중에서 언급인데, G. 보스는 히브리 본문에 대한 해석에 대한 견해와 가능성에 대한 또는 방법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난 다음에 언급한 내용이 바로 '이 모든 파생 설명은 완전히 추측들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해석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 따른 여러 정황적 당위성을 학자들이 상대적으로 옹호하고 있지만, 그 해석적 당위성은 자존의 절대자의 계시로서 이름적 계시로써의 스스로 해석적 정당함을 취한다는 것비로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 해석들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있으나 용납당위성은 사람들이 비로소 임의적으로 강조하는 가운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과 달리 출 3:14절에 있는 여호와에 대한 해석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라는 해석은, 그 해석의 용납당위성이라는 존재를 스스로 취하는 스스로의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할 때에 다른 해석적 타당성들은 임의적으로 강조할 수 있다는 측면만 고려되어졌기 때문에 G. 보스는 억측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게할더스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p. 150 중

'..문맥에서의 강조가 은혜스러우시겠는 약속을 시행하셔서 은혜스러우시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있다기 보다도, 자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이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강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고 보면 여호와란 이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외부에서 어떤 영향도 받으심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약

그러나 다른 한 요소, 즉 신실성의 요소가 처음부터 똑같이 강조되어 있다.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출6:5-6,8). 모세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보이신 출애굽기 33:19절도 여호와라는 이름과 연관되어있다(신 7:9; 사 26:4; 호 2:20; 말 3:6)'




해설: 여호와에 대한 해석과 그것을 증거하는 것모세의 사역의 중심이었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행하라고 하신 것이 예수님의 가르쳐주신 주기도임을 기억할 때(마6:9)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심을 받도록 하는 것 그 이름을 반포하는 것(반포라는 개념이 증거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일 때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이 반포되어지는 것에 나타나는 주의 주권적 자존적 의지의 뜻하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그 이름을 선포하는 것에 앞서는 주의 뜻을 해아리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읽게 되는 것은 출애굽기 33:19절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구절보다도 먼저 주목하여야 하는 당위성이 이미 부여되어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 33:19)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우리 앞에 반포하게 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은혜의 수여자로서의 주권적 뜻하심의 실제의식을 가진 가운데서 그 은혜의 긍휼의 사실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주권적 뜻하심의 실제의식이라는 개념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 따른 은혜와 긍휼 그리고 일반사실규정이라는 해석적 사실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존의 절대성의 재가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절대 보편성이 부여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상대적 무한보편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상대적인 진리의 사실규정과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4.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p. 356

..이사야의 환상 사건 속에서 적어도 셋 번은 그는 이 사상을 충만하게 전달한다. 여호와의 임재는 성전을 충만케 하였고, 온 땅은 그의 영광을 가득찼으며, 성전에는 연기로 가득찼다. 3절의 단어들은 더욱 많은 암시를 준다. 만약 우리가 원어에 더욱 가깝게 표현한다면, “세상에 충만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 분이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선지자는 여기에서 신앙적 의미에서 실제적 실현을 발견한다.



해설: 게할더스 보스의 이사야 사상은 마태복음 6장에 주께서 말씀하신 주기도에 대한 내용중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종의 모습을 보게 한다. 이것은 구교의 입장과 같은 어떤 은혜의 주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의 계시로써의 영광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를 받는 가운데서 실존적 정당함과 그 만물의 미학적 사실과 그 실존을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보스가 언급하는 '신앙적 의미에서 실제적 실현을 발견한다'는 그 표현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의 실제성을 이사야가 말하고 있음을 읽고 있는 것이다.





5.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제8장 이사야 초기 예언의 교리상 특징들 p. 357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통한 여호와의 자기계시에 대한 깊은 신앙적 관심의 결과로서 이사야의 개인적 삶은 매우 깊은 단계에까지 그의 공적 소명에 복종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개념이 그의 예언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의 예언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 우리가 예레미야에서 본 것과 같이 객관적인 메시지와 그 메시지를 지니는 사람의 주관적인 감정 사이의 비극적인 갈등 때문에, 여기에서 있을 곳이 없다. 그 이유는 이사야의 예언이 덜 경고적이거나 혹독하지 아니해서가 아니라, 그의 관심이 다른 종류의 호의적 반응에 대한 여유가 거의 없이, 그의 환상 앞에서 지나가는 신적인 요소에 매우 집중하였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이사야보다 더욱 헌신의 제단에 삶을 바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 헌신은 모두 여호와께 바친 헌신이었다. 이사야 6장에서, “나를 보내소서”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영광의 환상에 사로잡혀 부르짖는 외침이었다. 계시가 뒤따랐을 때에 후퇴는 없었고, 감당하여야 할 사역은 단련과 심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떨리는 질문인, “주여 어느 때까지?”는 선지자의 애국적인 본능이 주장하는 유일한 형태이다. 그 이후에는 모든 것이 체념된 상태이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엄숙한 선포를 방해하는 어떠한 슬픈 말도 허락되지 아니한다.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께 붙잡힌 양심에서, 순수한 인간적이며 한 민족적인 기준에서 판단되는 논점은 2차적인 문제이다. 이사야 6장의 정확도에 대한 심리적 비판은 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일반적인 선지자의 마음과 특별히 이사야의 마음은 일방적으로 예언의 윤리적 사명을 더욱 강조하는 현대 이론보다 더욱 기본적이며, 더욱 근본적으로 신앙적 힘에 의하여 지배되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더욱 깊은 동기들의 영향을 허용하도록 강요한다면, 이러한 것들이 의로운 설교자로서 명백히 실패하는 관점에서 선지자를 지지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연역적으로 주장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해설:G.vos가 이사야를 해석함에 있어서 '여호와의 개념이 그의 예언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의 예언이 그의 삶을 지배한다'와'하나님 중심과 하나님께 붙잡힌 양심에서'의 언급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여호와의 개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성경신학에서의 언급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 특히 자존의 절대자로서 자기 절대 정당함을 가지고 선택하신 상대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사실성의 진리성을 말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임의적인 상식적인 개념에서의 동의적 차원에서의 겨우 우선적 개념으로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대한 그 정당함에서 상대적인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면서도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으로서의 합당한 절대의 권위를 인정하는 그리고 순종함을 말하는 개념임을 기억하여야 함이 마땅하다.




6. 게할더스보스의 증거.. 셈의 하나님



해설: 셈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측면에서 사실규정을 하는 증인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써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을 읽게 되는 것이며 언약을 이루심에 대한 전반적인 말씀을 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으로써의 보스의 글에 대한 설명이다.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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