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언급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우리가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라고 하는 것보다도 앞서는 진리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시라는 것(
각주1)과 그러한 진리와 사실로 인해서 우리 인생의 행보의 사실을 말하게 되고 또한 그 행보를 위한 실제적 사실도 말하게 되는데 그것의 근거가 성경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형식적 순환론적 모순이라는 판단이 가능하지만 그러한 것이 기각되어지는 것은 또한 앞서 합당하게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신의식과 신지직이라는 것의 실존으로부터의 타당성을 힘입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론에 즈음해서성경대로 살아야 할 이유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 앞서는 진리와 사실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출 3:14)이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러한 사실에 반론적 입장의 고전적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니체의 입장인데, 그것은 인식론적 존재론에 입각한 임의적 신해석과 그 비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하다는 것은 항상 양립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 참되다고 함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인식적 한계내에서 또는 한계밖이라는 이성적 규정의 탈실존을 말한다고 하여도 이성의 객관적 근거지움이라고 하는, 이성의 재가를 받고 이성의 재구성에 따른 구성체로서의 타당성을 입는다는 소위 속된 표현으로 등떠밀리어 신의 자리에 서게 되는 자들은 진정한 신이 아닌 것입니다.
니체가 생각했다고 하는 철학의 입장(
각주2)에서 본다면 결국 그러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에서는
인위적인 신이라는 개념에서 참된 신을 말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정직할 수 있으나 그러한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인 것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각이 정당성을 이미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해석적 정당성을 그 자체에서 찾지 않고 의지적으로 부여하고 싶어하는 정신을 내어준 임의적 의지의 잘못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해석은 그와 같이 인식론적 존재론에서는 비로소 신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으로써 또한 인식론적 존재론에서 객관적 신존재적 규정과 그에 따른 신에 대한 비판도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것과 최소한 자기를 기만하기 위한 비이성적 삶의 고통을 완화하기위한 진정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식론적인 존재론, 쉽게 이야기해서 인위적으로 존재규정과 비판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신을 이성의 한계에서 규정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사실적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할 때에 참된 신의 말씀에 의거한 그 말씀하심과 규정하심이 진정 사실로서의 실제가 되어지는 절대의 재가가 되어진 실존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인간이 자존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음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자의식은 시간의 판단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속성적 진실함과 영원함에 신실하게 스스로 취하신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스스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에 대한 자의식적 인식의 충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시간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에 의식적 영향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지만 우리 피조물은 그러한 시간이라고 하는 계기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알고있는 상태에서도 알아간다는 그 중심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성도들이 시간이 허락되어진다는 개념보다도 시간을 주장하는 가운데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적 우리의 실존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실존적 의미와 그 윤리적 행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모든 총체적인 것을 말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과 그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적 영광 즉 그의 왕되심과 그의 제사장적 권세와 그의 선지적 권세라고 하는 그 사역적 측면이 우리의 신앙의 삶의 고백되어져야 한다는 것과 자연스러운 마음과 몸의 표현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임의적 생각과 사유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적 사유에서 비롯되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존적영감을 나타내는 성경의 자증의 영광'(Autopistia)을 따라서 그 계시의 영광을 따라서 섭리를 나타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말씀대로 살아야할 이유의 총체적 기본적 이유의 실재와 실제인 것입니다.
각주1) 이슬람에서는 지나친 종교적 패러디를 행하고 있고 그것은 기만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절제하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에도 합당할 것으로 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알라외에 다른 신이 없다'(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는 말을 함부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기독교를 모방하고 있고 또한 기독교의 언어까지도 모방하며 진리까지도 모방하는 가운데서 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슬람의 전통에서의 진화적 개념의 신이라고 하는 개념이 또는 격상된 신이라는 개념이 진정한 고유의 신(God)를 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하여서 말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진화라는 개념에서 고유하지 않던 신의 개념이 고유라고 하는 개념으로써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을 답변해야 한다. 그것없이는 '알라는 한낫 조작되어진 신'(Alah, NO God but just a god made)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종교적 패러디라고 함은
그러나 나는 일부러 개혁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슬람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는 폭력과 유혈사태가 (이슬람과 서양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주로 무슬림 사이의 내적 투쟁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이슬람 내부의 갈등이 모든 종교가 근대화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겪게되는 그런 종교의 갈등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기독교와 이슬람 개혁에 대한 대비가 가능하지만, 간과되어서는 안될 유사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종교 전통에 존재하는 보편적 갈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은 누가 신앙을 정의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느냐, 개인인가 기관인가에 대한 갈등이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8.)
알라가 고유의 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고유의 신이 된다는 개념에 대하여서
창조자는 ‘알라Allah’라고 불렀는데, 알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단순히 신을 의미하는 ‘알 알라 al-ilah’가 축약된 것이다. 그리스의 제우스처럼 알라 역시 비와 하늘의 신이었으나, 이슬람 이전 시대에 최고신으로 격상되었다. 아랍신들 가운데 알라의 두드러진 위상은 평민들이 탄원하기 어려운 최고의 신으로 인식되었으므로, 오직 위기에 처했을 때나 감히 탄원할 nt 있는 존재였다. 알라의 세 딸 알라트 Allat(여신), 알 웃자 al-Uzza(전능자), 마나트 Manat (운명의 여신)과 같은 중재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훨씬 편리했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42.)
패러디라고 함에 있어서는
아랍인들이 알라를 유대인의 야훼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신도 아니고 우상도 아니었다. 6세기 아라비아에서 유대의 유일신교 monotheism는 우상숭배의 아랍인에게 결코 이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랍인의 우상숭배는 전혀 다른 종교적 이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교적 아랍인들은 유대교가 자신들과 비슷한 종교적 개념을 단지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해했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46.)
앞서간 많은 예언자처럼 무함마드 역시자신이 새종교를 창시했다고 주장한 적은 결코 없다. 스스로 인정한 바와 같이,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에 존재하던 종교적 사상과 문화적 관습을 개혁하여 유대인과 기독교의 신을 아랍인에게 알리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였다. 꾸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께서 노아에게 명하신 종교를 너희들의 종교로 정하셨느니라. ··· 그것은 신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에게 명한 것과 같은 종교이니라.(42:13)”
젊은 무함마드가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종교적 상황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이슬람의 독특하고 신성한 기운은 다인종 다종교적 사회와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는 젊은 무함마드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믿음없는 아랍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혁명적 메시지를 만들게 했을 것이다. 비록 그 시대를 가리켜 ‘무지의 시대(자힐리아)’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56.)
글쓰는이의 부언 : 꾸란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 권위라고 할 때에 그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기독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할 때에 고유의 하나님을 말함에 있어서는 알라의 신격화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임의성의 합리성에서 파생된 당위성이고 본래성의 정당함과 비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니체적인 삶을 위한 이슬람의 삶을 위한 해석과 기술일뿐 참된 자존의 하나님의 본래성과 동일시할 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진화나 격상에서 본래를 비로소 말한다는 것은 파생적 정당함이 본래적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거나 정당화할 수 있다는 성립되어지지 않는 기만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적 정당함을 합당하게 취할 수 있는 자는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Jehovah)와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Jehovah is God. 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사 45:5). apart from me there is no God. (NIV), there is no God beside me.(KJV), Besides Me there is no God.(NASB)
패러디를 하더라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을 성립되어지는 것과 같이 말한다면 그것은 기만이요 거짓의 사실로써 그리고 거짓존재로서 실존적 자리매김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알라는 한낫 조작되어진 신'(Alah, NO God but just a god made)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이슬람의 정직일 것입니다.
각주2)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pp. 105-107.
"니체에게 ‘가치’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 방식이며, 이것은 철학에 대한 반성적 물음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이런 질문방식은 니체로 하여금 철학적 활동을 해석적-예술적 활동으로 이해하게 하며, 철학의 가치론을 삶의 실천Lebens praxis 라는 기능에서 찾게 한다.
(중략)
해석은 해석자의 힘의 상승과 삶의 고양을 추구하는 인식의지에 의해 힘의 상승과 삶의 고양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인식의지로 자신을 표현하는 힘에의 의지가 해석작용의 규제원리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의 다른 목적들은 부차적 목적이거나 부수적 현상일 뿐이다. 철학은 해석인 한에서 철학 또는 삶에 봉사하는, 삶의 기술이다.
(중략)
여기서 니체는 해석적 철학의 특징에 대해 ‘비자발적 망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힘에의 의지라는 규제적 원리에 따른 배제이고 망각이며, 그런 한에서 철학적 해석은 가치중립적 인식일 수 없다. 철학적 해석작용의 결과는 삶이라는 목적을 위한 의미 인식일 뿐이다.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개념 ‘진리를 발견하는entdecken 기술’이라는 철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 정의를 재검토하게 한다. 이 정의가 불충분한 것은 그것이 진리를 삶보다 우선시하기 때문이고, 진리가 해석자의 삶과 힘에의 의지에 의해 창조schaffen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글쓰는이의 언급 : 니체의
생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삶의 의지적 표현으로서 생기를 불어넣는 것과 같은 가운데서 구성적 실제규정과 그것의 정당함을 그는 세웠습니다.1881년에
“생성의 무죄에 대한 입증 Die Unschuld des werdens zu beweisen”(각주참고 KGW VII 1 7[7], 245쪽이하; VII 3 36[10],277쪽)(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pp. 108-109.)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파생적 타당성을 말했을 뿐 진실로 그
자체적 정당함의 실존으로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생적 정당함과 본래적 정당함은 아이소모픽(
isomorphic)한 개념 유사개념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동일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본래적이라고 하는 말을 철학자들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상식적 보편적 동의가 가능하다고 임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라 말할 뿐이지 비로소 자존적 정당함의 정당성에서 파생되어진 사실로서의 실존을 의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니체역시 삶에 대한 의지적 정당함을 말하는 합리성에서 파생하는 타당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역시 절대의 자존의 실존과 그의 행보의 타당성을 비로소 입은 자들을 판단할 수 없는 것으로써의 사실과 실존적 자리매김되어지는 것입니다.
각주 3)
Autopista 성경의 자증 : 성경의 자증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어떤 닫혀진 진리관을 말하면서도 그 보편성의 자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되어지며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으로서의 그 실존적 영광의 합당한 속성적 성격이 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닫혀있다는 개념의 편협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으로서의 보편성을 상실했다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습니다. 비록 판단 가능하다고 해도 절대보편성의 재가가 있다는 실제적 정당함은 닫혀있다는 상식적 판단의 보편성을 오히려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이 그의
계시적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그 성경은
자기 실존적 증거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현실적인 실제의 사람들의 인식의 감화와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가운데 성경이 기록되도록하는 섭리를 나타내는 것으로써의 계시였습니다. 그 계시의 기록과정의 모순형식이 가능한 것까지도 구별하여서 나타내시기를, 그러한 방법을, 자존자의 절대적 보편성의 재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하고 개별적인 요소로서의 성격을
임의적으로 축소 또는 배제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인식론적 실재론에 입각한 실제의식에 있어서 합리적 필요성과 가치성에 있어서 만들었다고 주장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물론 니체의 생의 가치철학적 입장에서는 더할나위없이 그러한 개념을 배제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멋대로 필요라는 정황적 개념때문에 비로소 성경을 맞추어 꾸며내는 신화적 작업을 했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다빈치코드와 그 아류와 같은 문학적 이성의 절제없음에 대한 판단이 유명세를 꿈꾸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자증이라고 하는 것은
닫혀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과 그 절대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재가되어진 가운데서의 보편성의 현실적 상대적 실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인 철학의 보편과 닫힘의 안티적 개념의 열림으로써의 보편을 말하는 것으로는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