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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8월 18, 2005

질송(Etienne Gilson)은 틀렸다-(각주내용)



각주1) 에띠엔느 질송, '토미스트 실재론과 인식비판' 이재용옮김 서광사 p12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Van Til, 개혁주의 신학서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360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기대감을 가져다 준다. 마치 질송의 사상에서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구현해보려는 일관성이 있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음듯이 보인다. 하나님에게서는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는 진리를 참으로 본 사람은 모든 실재를 자충족적인 하나님의 전제의 빛에서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질송은 그리하지 않는다.


필자의 해설 : 반틸이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존재의 유출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 철학을 말한다면서 성경의 하나님의 존재를 임의적 존재자체로만 생각하고 철학적으로 비로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의 유출을 말하는 것은 철학적 입장으로 비로소 삼위를 말하려고 하는 것임의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질송이 간과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재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임의적으로 한정함이 옳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이 신학에 필요에 따라서 말하기 위해서 도입되었던 것을 필로(philo)는 말하고 있는데 그 필요에 따른 차용적 입장을 위해 성경의 증거 특히 하나님의 존재를 존재로 임의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어진 역사인식의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성경에서 인용할 수 있다는 개념만으로 그 가능성에서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독교 철학이라고 함의 정체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실재적 정의가 성립되지 못한다. 왜냐면 그것은 인용가능성이라는 개연적 정당함에서 사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주2) Van Til, 개혁주의 신학서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362


각주3)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역, 도서출판 엠마오 pp. 117~119
"심판은 죄에 의해서 도덕적 비정상성에 빠진 세계의 진전 과정의 필연적인 총괄이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황폐와 죽음에 사로잡혔던 것을회복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질 곳에서는 이 두 가지의 성취 자체(ipso facto)가 이 세대에서 무엇이 잚소되었는지를 하나 하나 보이며, 그것을 배제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데 부활과 관련해서는 새로운 부가적인 요소가 고려되어야만 한다."(lbid p.117.)

"그리고 그 전체의 색조와 의미가 여호와 하나님 현현 사상으로 부터 메시아적 사유로 급격히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는 대개 기다리는 큰 "오심"(the great and uniformly expected "Coming"이 메시아의 오심이다. 아마도 신약의 사상 구조에서 다시 나타난 구약의 개념 중에서 이보다도 더 급격하고 중요한 변화를 겪은 것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예수께서 '쿠리오스(주)'-칭호를 돌려드린 것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쿠리오스'칭호의 전용(轉用)은 주 여호와(Jehovah-Kurios)의 오심을 메시야의 강림과 거이ㅡ피할 수 없게 동일시하도록 만들었다."(lbid pp.118~119.)

필자의 해설 : 게할더스 보스는 신구약의 불연속성적인 현상적 입장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그 연속성의 사실과 그 합리성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서 구약적 용어와 그에 담겨진 사상들에 대한 메시아 안에서의 정당함의 시비를 거쳐서 사용되어지고 또 구별되어진다는 점에서 사상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율법의 모습들 중에 취한 바가 있고 버린바가 있다고 하는 말이 가능한 현상적인 표현이 있을 수 있는데 사실 그것이 아니라 완성적 의미로써 재 새롭게 하시는 가운데서의 구별적 언어와 그 담긴 사상으로 구별하였다는 것이 메시아적 사유이며 동시에 전형적 정당함을 입은 것으로 신약을 말하게 된다. 물론 메시아의 강림과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과의 동일성을 말하게 되는 가운데서 그 앞선 신구약의 연속적 실재와 사실을 말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4) 알란 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김경진 역 생명의말씀사(THE GREAT DEBATE Calvinism, Arminianism and Salvation by Alan P. F. Sell, Published in English by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 U.S.A.) p. 27

"신자가 이생에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순종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비록 어거스틴의 지지를 빌어 그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 신성(神性)에 대해서는 알미니우스는 아우토데오스(auto Theos)를 두 가지 의미로 정의하였다. (1) "참으로 하나님이신 분" 그리고 (2) "스스로 하나님이신 분." 알미니우스는 전자를 받아들이고 후자는 거부하였다."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필자 해설 :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그 증거는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자로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알미니우스는 그러한 합리성의 정당함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있지 않다는 것과 에뜨엔느 질송도 그러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철학의 실재를 존재론으로 보겠다는 합목적성만 생각하고 또 인용적 가능성을 위한 합리성만 취하고 있지 자존의 절대자에서 비로소 합리성의 정당함을 얻고자 하는 중심인 이미 없다.. 그리고 토미즘도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질송은 토미즘에 정통하면 할 수록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임을 나타내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실재는 '가톨릭에서 말하고 있는 중세시대의 합리성을 이해할 머리가 없는 가운데서 무질서와 혼돈을 말하는 것'(요셉 피페, '중세 스콜라신학' 이재룡, 서광사. 서문의 마지막 부분) 에서 파생되어진 것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답변하지 못하는 중세의 가톨릭의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실재적 증거를 위한 것으로 그 실존적 증거를 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비록 그것에 대한 인식이 흐려져서 현대신학적 개념이 다시 스콜라신학적 연속성을 말하는 미련함이 있다고 하여도 실제는 중세의 연속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가톨릭의 사실을 말하지 못함에 대한 진정한 하나님을 말하고 증거하는 것이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의 정체성이다.